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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간 노숙인에 ‘근사한 한끼’ 제공한 파란눈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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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나의집 작성일24-08-02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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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에게는 하루의 전부인 식사이기에, 늘 근사하게 차려주려 합니다.”

지난 12일 경기 성남시 중원구 사회복지법인인 안나의 집 무료 급식소에서 만난 벽안의 김하종(67) 신부는 지난 26년간 품은 마음속 각오를 이렇게 털어놨다. 이탈리아인인 그는 1990년 한국으로 들어와 도시빈민사목(목회자)으로 활동하다, IMF금융위기 여파로 전 국민이 고통을 받을 때인 1998년 7월 7일 배고픈 노숙인들의 허기를 채워 주려 안나의 집의 저녁 무료급식사업을 시작했다. 성남 달동네를 누비던 패기 넘치던 40대는 어느새 흰머리가 성성한 장년으로 변했다. 푸른 눈의 산타로 불린 김 신부는 2015년 귀화해 이젠 어엿한 한국인이 됐다.

오후 1시 식재료를 다듬던 그는 “26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식사를 제공했다. 모두 함께 힘을 모았기에 기적이 일어났다”고 뿌듯해했다. 주 6일(월~토요일) 매일 500~700명의 이용자에게 저녁 식사를 제공해온 지난 26년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2008년 ‘리먼 브라더스’ 금융 위기 여파 등 경기침체로 급식사업 후원이 줄어들 때마다 백방으로 후원자를 찾아다니던 일을 생각하면 단 하루도 마음 편안 날이 없었다.

특히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2020년 전국의 무료급식소들이 줄줄이 폐쇄될 당시는 최대 위기였다. 그는 “보건당국 압박에도, 그들을 굶길 수 없기에, ‘내가 다 책임지겠다’며 끝까지 문 닫지 않고 버텼다”며 “방역 등으로 두 배 더 힘들었으나, 한 명의 감염자도 나오지 않고 코로나 시기를 이겨냈다”고 당시 기억을 떠올렸다.

식재료 준비가 끝나자 그는 잠시도 쉬지 않고 안나의 집 안마당으로 달려갔다. 오후 4시 첫 배식에 맞춰 미리 와 기다리던 200여 명에게 다가간 그는 두 손으로 하트를 만들어 보이며 ‘환영합니다’라고 인사했다. 그는 “경제적 이유로 한 끼도 제때 챙겨먹지 못하는 이들이 ‘우리도 대접받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배식 전에는 늘 직원들과 함께 환영 인사를 건넨다”고 말했다.

안나의 집 26년의 기록은 상상을 뛰어넘었다. 식수인원은 309만 명을 돌파했고, 식사 준비, 설거지 등을 도운 자원봉사자도 17만9,000명을 넘었다. 끼니를 넘어 자립도 돕는다. 안나의 집 3층 ‘노숙인 자활시설’ 입소 인원도 7만5,000명에 달한다.

직원 52명에 4층짜리 건물(2015년 신축)까지 갖춘 큰 규모의 사회복지법인으로 컸지만, 대표인 그가 가진 재산은 경형급 기아차 레이와 옷 몇 벌이 전부다. 지금도 자신이 입적한 한국 오블라띠 수도원에서 살고 있다. 손에 쥐는 월급도 60만 원이 전부다. 교통비로 쓰면 남는 게 없어도 그는 “이거면 충분하다”며 웃었다. 2014년 호암재단 호암상 수상자로 선정돼 받은 상금 3억 원도 안나의 집 건물 신축비용으로 다 내놨다. 김 신부는 “이탈리아에 홀로 계신 노모에게 용돈을 보내드리고 싶은데, 아직도 되레 후원을 받고 있다”고 했다.

청소년 지원사업도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부모의 방임과 학대 피해를 본 청소년이 임시로 생활할 수 있는 그룹홈과 쉼터, 사회진출을 돕는 자립지원관 등을 운영 중이다. 10대와 20대 청년 17만7,900명이 이들 시설에서 지원을 받았다.

지난해에는 창립 25년을 맞아 안나의 집에서 생활해온 노숙인, 청소년과 함께 ‘오늘 하루도 선물입니다’라는 제목의 산문집을 펴냈다. 김 신부는 이 책을 비롯해 ‘꿈, 나눔, 아름다운 동행(2018)’, 등 총 5권의 책을 출간했다. 안나의 집 운영에 보탤 후원금 모집을 위해서다.

매일 쌀 160㎏을 마련해 따뜻한 한 끼를 만들고, 저녁에는 그룹홈 등 청소년 100여 명을 돌보는 일이 고되고 지치지만 그 끈을 놓을 수 없다고 했다. “악취가 풍겨 누구도 곁에 가지 않았던 한 노숙인에게 빵과 음료를 건네며 꼭 안아줬는데, 세상 다 얻은 것처럼 밝게 웃어 보이길래 그때 결심했죠. ‘안나의 집’을 아무도 찾지 않아 문을 닫는 날을 꿈꾸며, 그때까지 이 일을 놓지 않겠다고요.”